푸이?
청나라의 12대 마지막 황제
1908년 11월에 큰 아버지인 광서제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제위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라고 지어 서구에서는
헨리푸이로 알려졌습니다.
청제 때의 연호는 선통제. 1908년 11월 14일에 큰아버지인 광서제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載灃)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제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라는 이름을 택했고, 이후 서구에서는 헨리 푸이로 알려졌다. 1924년 푸이는 몰래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 있는 일본인 조계(租界)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고, 1934년 만주국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강덕(康德)이라고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50년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59년 특사로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식물원의 기계수리상점에서 일했다. 1964~65년에 영어로 된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가 간행되었다.
- 다음백과사전 인용 -
푸이[溥儀]는 중국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簿儀]'이며,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豊)의 아들이다. 1908년 10월 서태후(西太后)는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의 뒤를 잇기 위해 푸이에게 제위를 잇게 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그해 11월 14일 광서제가 죽자 푸이는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다. 연호는 '선통(宣統)'이라 했으며,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섭정했다. 순친왕은 황족이 절대 다수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황족 중심의 집권화를 도모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진압 과정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 조정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는 난징[南京]에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여 수립된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청을 물러나게 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는 대신 총통 자리를 물려준다는 쑨원의 약속을 받고, 북부의 군벌들을 동원해 공화정을 선포하도록 청 왕조를 압박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황태후가 푸이를 대신해 퇴위 조서를 반포했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베이징[北京]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청 왕조는 멸망했고, 푸이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시사프로그램 역사저널에서 마지막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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