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토픽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하태마태 2019. 12. 25. 01:51
300x250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역사적인 그날이 결방되고 손정도 목사에 대해 방영 하였습니다.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그는 누구인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교 목사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은 해군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 제독이며, 윤치호 일가와는 사돈이면서 윤치호의
이복동생 윤치창이 그의 맏 사위였습니다.

1872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손형준과 오신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손정도 목사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네요.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손정도 목사의 아버지인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습니다.

1902년에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서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가정이
목사 댁이였고, 그날 그 목사로 부터 신학문,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기독교로 개종을 결심한 그는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한 뒤에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쉈다고 합니다.

졸업반이던 1907년 1월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실중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시험 부정행위, 속임수, 절도
등을 회개할 때 참여하였습니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감리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습니다.

1910년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청나라에 파견될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베이징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베이징에서 조상환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신민회의 핵심 인물이였습니다.
이후 조상환을 통해 안창호를 만나게 되었으며,
깊이 친해져서 서로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1911년 연회 참석 차 귀국하여 4월 " 기독교인의 자신력 "
이라는 글을 ' 그리스도인 화보 ' 에 투고했습니다.
또한 1911년에 손정도 목사는 한국에서 집사직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북경으로 가 중국인과 조선족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1912년에는 다시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선교하여 200명의 신자를 얻고, 자력으로 모금과 강연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이층 예배당을 헌당하고
한국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로 조선총독부 눈에 들게되었죠.

1912년 하얼빈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습니다.
1914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습니다.


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다. 이 때 탁사 최병헌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에 감동받은 신도들이 몰려왔고 교회 건물이 꽉 차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자를 끌어모았습니다. '동대문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당시 교회의 규모는 전도사 6명, 지교회수 12곳, 입교인 312명, 학습자 142명, 원입자 469명 등 924명이었으며, 주일학교 학생은 786명이었습니다. 성직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평일에도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무엇인가 열심히 의논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습니다. 손정도는 하란사를 통해 손병희의 애첩인 주산월과 접촉하여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서명하게 하고 경비문제를 해결하는 실력을 보였습니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강공의 평화회의 참석은 하란사의 급사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에 참여했던 핵심인물들은 해석, 현순, 최창식 등 모두 감리교 목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암호명은 손정도는 입정, 현순은 석정, 최창식은 운정으로 입석정이었습니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191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
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습니다. 홍진, 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과로와 격무, 체력저하, 스트레스, 고문후유증 등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1931년 1월 해석은 한 동포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하였습니다. 별세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습니다.

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해석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친과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300x250

'HOT토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당 닭강정 30인분 사건  (0) 2019.12.25
2019 가요대전 라인업  (0) 2019.12.25
봉암사 적명스님 입적  (0) 2019.12.24
광양제철소 포스코 폭발 사고  (0) 2019.12.24
한채아 남편 차세찌 음주운전 혐의  (0) 2019.12.24